You are here
Home > > 외우고 싶은 좋은 시 추천 10편

외우고 싶은 좋은 시 추천 10편

자꾸 읽어보고 싶은 좋은 시 10편을 모아보았습니다. 추천해드린 시를 읽고 마음이 조금 더 따뜻해지시길 바랍니다.


이마
신미나

장판에 손톱으로
꾹 눌러놓은 자국 같은 게
마음이라면
거기 들어가 눕고 싶었다

요를 덮고
한 사흘만
조용히 앓다가

밥물이 알맞나
손등으로 물금을 재러
일어나서 부엌으로


빗소리 곁에
장석남

1.
빗소리 곁에
애인을 두고 또
그 곁에 나를 두었다

2.
빗소리 저편에
애인이 어둡고
새삼새삼 빗소리 피어오르고

3.
빗소리 곁에
나는 누워서
빗소리 뒤에다 발을 올리고
베개도 자꾸만 고쳐서 베고

4.
빗소리 바깥에
빗소리를 두르고
나는 누웠고
빗소리 안에다 우리 둘은
숨결을 두르고


소년에게
박성우

 소년이여, 작은 창 열고 나와 소녀에게 목도리를 둘러주어라 여름부터 와 있었을 소녀에게 스웨터를 내주어라 행여라도 털장갑은 내주지 마라 소녀를 자전거 뒤에 태워 그대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게 하라


병든 짐승
도종환

산짐승은 몸에 병이 들면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다
숲이 내려 보내는 바람 소리에 귀를 세우고
제 혀로 상처를 핥으며
아픈 시간이 몸을 지나가길 기다린다

나도 가만히 있자


탁! 탁!
이설야

마을버스에서 내린
맹인 소녀의 지팡이가 허공을 찌르자
멀리, 섬에서 점자를 읽고 있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따가워지기 시작한다

도다리가 잠든 횟집 앞
무거운 책가방을 든 소녀가 휘청거리며 지나간다
오른손에 움켜쥔 지팡이가 갈라진 보도블록을
탁! 탁! 칠 때마다 땅속 벌레들의 고막이 터진다

허공 어딘가 통점을 꾹. 꾹. 찌르며
헛발 딛는 소녀의 종아리가 되어
집을 찾아가는 지팡이

무수한 길들이
종아리 속에 뻗어 있다


집에 못 가다
정희성

 어린 시절 나는 머리가 펄펄 끓어도 애들이 나 없이 저희들끼리 공부할까봐 결석을 못했다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 여자가 어머 저는 애들이 저만 빼놓고 재미있게 놀까봐 결석을 못했는데요 하고 깔깔댄다 늙어 별 볼일 없는 나는 요즘 그 집에 가서 자주 술을 마시는데 나 없는 사이에 친구들이 내 욕할까봐 일찍 집에도 못 간다


그렇게
김명수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모습
한결같이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
한결같이
향기와 푸름과
영원함은 그렇게
꽃은 여러 송이이면서도 한 송이
한 송이이면서도 여러 송이
나무도 여러 그루이면서도 한 그루
한 그루이면서도 여러 그루


나는 벌써
이제무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나는 벌써 죽었거나 망해버렸다


늙음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가족의 시작
김주대

여자가 아기의 말랑한 뼈와 살을 통째로 안고

산후조리원 정문을 나온다 아직

아기의 호흡이 여자의 더운 숨에 그대로 붙어 있다

빈틈없는 둘 사이에 끼어든 사내가

검지로 아기의 손을 조심스럽게 건드려 본다

아기의 잠든 손이 사내의 굵은 손가락을

가만히 움켜쥔다



출처 책 정보


Top